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고 그것에 적응하면 또 다른 새로운 환경이 펼쳐진다. 마치 끊임없이 시험대에 오르는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도 냉정해진다.
아기는 어려운 수저질을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어린이로 커 있고, 이전처럼 편하게 손으로 주워 먹을 수 없는 환경이 돼 있다. 이제는 엄마 품을 벗어나서 학교라는 곳을 가려고 한다. 새 학기 특유의 긴장감과 환경이 바뀌는 것은 그만큼 스트레스였다.
학교나 직장, 또는 인간관계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안타깝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겠고 냉정한 시선을 보낼 수도 있다. 성취는 여러모로 유익한 경험이지만 공감 능력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이 있다.
반대로 그 고충을 겪어본 사람은 그 힘듦을 잘 공감할 것이다. 전학생의 고충은 전학을 해본 사람이 더 잘 이해할 것이고, 이별을 당한 사람의 고충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꼭 잘 공감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냉담한 경우도 많다.
아주 견고한 모범 답안이 그 세상과 구성원의 삶을 지배하고 있을 때 이런 경향은 두드러지는 것 같다. 그리하여 모범 답안대로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주어야 할 공감의 기회를 앗아가 버린다. 부적응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수치나 비난의 대상이 된다. 처음에는 중립적인 용어였던 관심병사란 말이 이제는 경멸과 수치심을 일으키는 용어가 되었다.
적응은 힘들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역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중에서 신생아가 엄마 몸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처럼 반드시 거쳐야 할 수도 있지만, 펭귄에게 숲에서 적응하라고 하는 것처첨 부적절한 것도 있다. 각자 가진 몸과 정신, 그리고 주변 환경이 다르니 각자 다른 성장통을 겪게 될 것이다. 유달리 오래 걸릴 수도 있고, 끝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 적응과정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며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도 있고, 나와 맞지 않는 곳을 과감히 떠나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지금 힘들다고 해서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 자책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배워가고있는 과정일 뿐이다. 먼 훗날 힘들어하는 우리의 후배에게 그 배움의 과정이 참 어렵고 괴로웠지만 의미 있었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