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나면 건물주 아닌 원장 책임"…국일고시원 계약서 논란
국일고시원 건물주-원장 간 임대차 계약서 '불의로 재산피해 발생해도 건물주 책임 없어' '불가항력 사고에도 보증금 반환 청구 못해' ''화재시 임차인이 책임 및 원상복구 해야" 전문가들 "보증금도 못 받는다 말이 안 돼" "보증금은 건물이 무너져도 반환 받는 것" "불공정 확실…재판 가면 해당 조항들 무효" 중개사 "건물주 요구 가능한 수준" 해석도 '임대인 유리' 동의하면서도 세부 의견 엇갈려 표준계약서 고지의무, 조항 구체화 조치 필요
7명이 사망한 종로 국일고시원의 임대차계약서가 불공정계약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사인(私人)간 계약이므로 법에 저촉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와 함께, '을'일수 밖에 없는 임차인이 최소한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최소한의 보완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2014년 11월30일 건물주인 한국백신 하창화(78) 회장과 그 여동생이 고시원장 구모(69)씨와 맺은 '부동산 임대차 (월세) 계약서'에는 불의나 불가항력의 사고가 발생해도 그 책임은 원장인 구씨가 지게 돼있다.
뉴시스가 확보한 계약서의 제9조에는 '임차인(세입자)의 재산상의 안전단속은 임차인의 단속 책임이며 불의의 사고로 재산 손해가 발생한 때라도 임대인(건물주)은 책임이 없기로 하며 천재지변, 전란, 화재, 기타 불가항력으로 본 건물이 멸실 파괴시는 임차인은 임대인에게 임차보증금 반환청구를 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어 '화재 기타 재난이 임차인(세입자)의 부주의로 발생할 시는 임차인(세입자)은 임대인(건물주)에게 즉시 상당금을 배상하여야 한다'면서, 조항 외 덧붙여진 '단서'에 '화재나 도난시 임차인이 책임 및 원상복구를 해야 한다'고 돼있다.
임대차계약서상 단서는 일종의 '특약사항'이다. 어떤 조항보다도 우선시 된다. 제9조 내용이 반복되면서도 '임차인 부주의로 발생할 시'라는 전제조건이 없어 이 또한 사고 귀책사유가 누구에게 있든 구씨가 책임지도록 하는 조항이 돼 버린다.
이 계약서가 건물주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서라는 데에는 전문가들의 이견이 없다.
심교언 건국대학교 부동산학과 교수는 뉴시스와의 통화에서 "제9조와 단서는 매우 특이한 경우"라며 "불공정한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도시개혁센터 팀장은 "특히 임차보증금 요구를 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보증금은 건물이 무너져내려도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법률가들은 하 회장 측과 구씨가 피해보상 등을 두고 재판까지 갈 경우 해당 조항들이 무효가 될 것으로 봤다.
대한변호사협회 생명존중재난안전특별위원회 위원 강서경·오세범 변호사는 "임차인이 임대차보증금 반환청구를 할 수 없도록 하는 부분, 화재나 도난 시 임차인이 책임 및 원상복구를 하도록 하는 부분이 화재 등 발생과 관련해 무조건적인 임차인 책임을 규정한 경우라면 민법에 반해 무효일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만약 이 계약서가 층별 임차인들 등 여러 명과 체결하기 위해 이미 마련된 형식이었다면 일종의 약관으로 볼 수 있다"며 "이 경우 임대인 고의 또는 과실 유무와 관계없이 책임을 면하도록 규정한 셈이어서 약관규제법에 따라 '불공정약관'으로 시정조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봤다.
반면 현장에서 일하는 공인중개사들은 "불공정하긴 하지만 임대인이 요구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해석했다.
15년 경력의 한 공인중개사는 "보증금을 청구할 수 없다는 조항이라든가, 단서 조항에 귀책사유를 명시하지 않고 그냥 '화재'가 났을 때 임차인이 원상복구 해야 한다는 조항은 추후 소송에서 건물주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면서도, "단서라는 특약사항에 화재 관련 조항이 들어가는 경우는 다반사며 이번 계약서는 악덕이라고 볼 수는 없다. 평범한 축"이라고 봤다.
28년차 공인중개사인 박모(56)씨는 "고시원이나 노래방, 술집 등 위험이 많은 업소에 세를 내주는 건물주 입장에서는 '신경쓰라'는 의미에서 해당 조항들을 넣었을 것"이라며 "계약서 자체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고 전했다.
주거시민단체들 판단은 또 다르다.
이들은 "임차인과 임대인이 기본적으로 '갑을' 관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대인에게 유리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본다.
임대인과 임차인 간 표준임대차계약서를 작성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이 대표적이다. 공정한 계약을 목적으로 기본조항들이 갖춰져있는 표준임대차계약서 작성을 건물주가 꺼리는 상황에서 임차인이 이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남은경 경실련 팀장은 "기업이 고객을 상대로 맺는 계약은 사회적 영향력 등을 고려해 공정한 계약을 맺도록 강제할 수 있지만, 고시원 계약서와 같은 개인 간 계약은 공정성 확보를 위해 제도화하거나 공식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렵다"며 "표준임대차계약에 대한 고지조항을 만들어 임차인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표준임대차계약서를 포함, 임대차계약서 조항이 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임경지 서울시 청년정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씽크대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수압이 얼마인지 등까지 세세하게 적는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 임대차 계약서 조항들은 대체로 두루뭉술하다"며 "세세하게 기재되지 않은 부분은 결국 임차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증가한다는 걸 의미한다"고 했다.
이번 단서에서도 '임차인에 의한 화재' 혹은 '임대인에 의한 화재'라고 세세하게 분류하지 않고 화재라고만 표기했기 때문에 결국 원장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커졌다는 뜻이다.
임 위원장은 "표준계약서가 비교적 공정하기는 하지만 정말 기본적인 조항들만 적혀있어 '단서'와 같은 특약조건에 부당한 조항이 들어갈 여지가 있다"며 "세세한 부분까지 조항으로 넣도록 하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